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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점촌별곡 12절 근대 산업의 거대한 심장: 쌍용양회(하)

엄원식 문경시 전, 학예연구관

기사입력 2026-08-2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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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동은 멈췄지만 새로운 산업·문화 공간으로 남겨야 할 위대한 유산

운크라의 원조로 건립된 신기동 시멘트 공장은 당초 계획에 따라 민간에 불하됐다. 인수금은 60억 환이었다. 1962년 화폐개혁으로 101의 교환 비율이 적용되면서 6억 원에 해당했다. 당시 국가 예산 규모와 물가 수준을 고려하면 현재 가치로 수조 원대에 이르는 막대한 자본이었다.
 


이후 쌍용양회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공장 규모는 꾸준히 확대됐다. 초기 2기였던 소성로는 4기로 늘어났다.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음 속에서 근로자도 1,200여 명에 달했다. 이 거대한 노동력이 만들어낸 막대한 현금 흐름은 점촌 경제를 팽창시킨 핵심 동력이 됐다.

 

1970년대 조국 근대화 시기 문경 시멘트 공장은 국가 인프라 구축의 최전선에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시멘트로 도로를 까는 것이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메모가 상징하듯 초가지붕 개량과 마을길 포장 등 새마을운동의 주요 사업에 시멘트는 필수적인 자재였다. 그 시멘트가 바로 신기동에서 생산됐다.

 

뜨거운 소성로를 빠져나온 회백색 시멘트 포대는 인접한 주평역에서 화물열차에 실려 전국 각지로 수송됐다. 당시 신기동 일대의 하늘을 뒤덮었던 시멘트 분진은 역설적으로 점촌이 누렸던 경제적 풍요를 보여주는 산업화의 흔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시멘트 산업의 구조적 변화와 자원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장의 심장을 뛰게 했던 인근 석회석 광산의 매장량이 줄면서 채산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로 무연탄 광산들이 문을 닫으면서 연료 수급에도 타격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시멘트 물류의 중심이 내륙 철도 운송에서 대형 선박을 이용하는 동해안 임해공장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내륙에 위치한 문경 공장은 육상 운송비용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석회석 생산량 감소와 설비 노후화까지 겹치면서 경쟁력은 점차 떨어졌다.

 

결국 2018년 쌍용양회 문경공장은 공식적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전후 복구와 새마을운동의 주춧돌 역할을 했던 60여 년의 임무가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쉬지 않고 타오르던 소성로의 불길이 꺼졌다. 신기동 하늘을 뒤덮던 굴뚝의 연기도 멎었다. 점촌의 근대 산업을 상징했던 웅장한 기계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가동은 멈췄지만 시설물에 담긴 역사적 가치는 여전히 크다. 이곳은 국내에 남아 있는 운크라 지원 시설 가운데 원형의 80% 이상이 보존된 대표적인 산업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문경시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과 사일로 등을 단순히 철거하기보다 보존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수소연료전지 발전과 영상 촬영 스튜디오, 도시재생을 아우르는 융복합 공간으로 재편하는 구상이다.
 


잿빛 시멘트를 뿜어내던 굴뚝 산업의 거대한 심장이 이제 친환경 에너지와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새로운 거점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시멘트 공장의 건립은 거대한 산업시설 하나가 들어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공장 담장 너머 신기동 일대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주거 공간이 들어섰다.

 

당시 문경 사람들에게는 낯설었던 서구식 도시 구획과 현대적인 주거문화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거대 공장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근대화 산물이었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신기동 사택 마을은 노동자들의 삶을 담아낸 공간이자 산업화 시대 문경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현장이다. 거대한 공장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근대화 유산인 신기동 사택 마을의 공간적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 향토사 기록의 다음 순서다.

 

 

 

 
이성일 기자

이성일 기자 (sllee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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