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에 쏘아 올린 국가 재건의 신호탄
1924년 점촌역에 기차가 들어오며 근대의 거대한 혈관이 뚫렸다면, 그 혈관을 타고 흐를 뜨거운 피를 만들어낸 최초의 심장은 신기동에 들어선 ‘시멘트 공장(현 쌍용양회 문경공장)’이었다.
쌍용양회가 신기동에 자리 잡기 전인 195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6·25전쟁의 참화로 국토 전체가 잿더미로 변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전후 복구와 국토 재건이 국가적 지상 과제로 떠오르면서 1953년부터 UN 산하 기구인 운크라(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본격적인 원조가 시작됐다.
당시 헐벗은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 가장 시급했던 3대 기간산업은 식량 증산을 위한 ‘비료’, 파괴된 인프라를 복구할 ‘유리’, 그리고 뼈대를 다시 세울 ‘시멘트’였다.
비료 공장은 충주에, 판유리 공장은 인천에 건설하기로 확정된 가운데 가장 막대한 물량이 필요한 시멘트 공장의 입지를 두고 국가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운크라가 문경 신기동을 최대 국책 사업의 최적지로 낙점한 이유는 명확했다. 신기동이 시멘트 생산에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시멘트의 주원료인 석회석과 이를 태울 연료인 무연탄이 문경에 풍부하게 매장돼 있었다.
둘째, 대량의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교통망이었다. 1918년 남쪽과 북쪽으로 신작로가 뚫렸고, 1924년 개통된 점촌역과 철로가 공장 부지를 관통해 수송과 물류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셋째, 공장 가동에 필수적인 풍부한 공업용수였다. 영강의 맑고 풍부한 물줄기가 신기동을 휘감아 돌고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입지는 없었다.
모든 조건을 갖춘 신기동에 마침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인 890만 달러가 투입되면서 거대한 역사가 시작됐다. 이 공장은 덴마크의 최신 습식 고로(킬른·국내 유일) 기술을 전면 도입한 동양 최고 수준의 최첨단 시설이었다.
1957년 9월 26일, 마침내 신기동 들녘에 우람한 건물이 솟아오르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2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준공식이 열렸다.
“우리나라를 하루속히 재건하자”는 치사에 맞춰 만세 함성이 쏟아졌고, 덴마크 기술자들에게 4개월간 기술을 전수받은 334명의 한국인 종업원이 우리 손으로 직접 기계를 돌리기 시작했다.
초기 소성로 2기가 뿜어내는 연간 20만 톤의 시멘트는 전국 각지의 부서진 방파제와 끊어진 다리를 다시 잇는 국가 재건의 단단한 주춧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