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곳은 보물이다”라는 첫 직감
오늘날 문경 굴봉산 돌리네 습지는 국가적으로 보호받는 자연유산이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람사르습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속의 작은 습지에 불과했다.
필자가 처음 이곳을 자세히 조사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곳은 반드시 보전해야 할 곳”이라는 확신이었다.
평생 수자원공학을 연구하며 국내외 수많은 하천과 습지, 지하수 체계를 조사해 왔지만, 산 정상부에 형성된 카르스트 돌리네습지라는 사실만으로도 학술적 가치는 충분히 특별했다. 더욱이 현장을 조사할수록 이곳은 단순한 습지가 아니라 지질학, 수문학, 생태학이 하나로 결합된 복합적인 자연유산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학자의 직감만으로는 국가적 보호를 이끌어낼 수 없다. 자연의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자료와 과학적 증거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굴봉산 돌리네 습지의 진정한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됐다.
2.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과학적 조사
국가 습지보호지역 지정의 출발점은 철저한 조사와 검증이었다. 습지의 보호 필요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아름답거나 희귀하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지형과 지질, 수문환경, 생태계, 생물다양성 등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가 확보돼야 한다.
특히 필자가 중점적으로 관심을 가진 분야는 수문학적 특성이었다. 왜 산 정상부에 물이 고여 있는가. 왜 건기에도 습지가 유지되는가. 지하수와 지표수는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양한 조사 자료와 연구 결과를 분석했다.
조사 결과 굴봉산 돌리네 바닥에는 석회암 풍화 과정에서 생성된 테라로사(Terra Rossa)가 두껍게 퇴적돼 있었으며, 이 층이 자연적인 차수층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한 강우가 습지에 저장된 뒤 서서히 순환되는 독특한 수문 구조가 형성돼 있다는 점도 밝혀졌다.
이러한 결과는 굴봉산 돌리네습지가 단순한 함몰지가 아니라 매우 독특한 자연 시스템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과학적 근거가 됐다.
3. 학술적 가치에서 사회적 가치로
과학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리 귀중한 자연유산이라 하더라도 지역사회가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보전은 어렵다.
당시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 습지가 왜 문경의 자산인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많은 주민에게 습지는 그저 물이 고여 있는 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수만 년 동안 축적된 지질의 역사와 수백 종의 생명체가 살아가는 생태계가 존재한다.
필자는 학술 발표와 자문, 설명회 등을 통해 굴봉산 돌리네 습지가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자연유산임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특히 문경이 보유한 독창적인 자연 자원이 지역의 문화·관광·교육 자산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사회 역시 점차 습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4.행정과 지역사회의 협력
국가 습지보호지역 지정은 학계만의 노력으로 이뤄질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와 관계기관, 지역주민, 전문가 집단이 함께 협력해야 가능한 일이다. 문경시 역시 굴봉산 돌리네습지의 가치를 인식하고 보호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현장 조사와 자료 수집, 관계기관 협의, 보전계획 수립 등 수많은 행정적 절차가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신뢰였다. 학계는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행정은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며, 주민은 현장의 보전 주체가 돼야 했다.
다행히 굴봉산 돌리네 습지는 이러한 협력 구조가 비교적 잘 형성된 사례였다. 지역사회는 자연을 보호하는 일이 곧 지역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고, 행정기관 역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결국 학술적 연구와 행정적 지원, 주민들의 관심이 하나로 모이면서 국가 습지보호지역 지정이라는 목표에 한 걸음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5. 2017년 국가 습지보호지역 지정의 결실
오랜 조사와 검토 끝에 2017년 굴봉산 돌리네 습지는 국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결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이 습지의 지질학적·생태학적·수문학적 가치를 인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 정상부에 위치한 카르스트 돌리네 습지라는 독특한 특성은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로 평가됐다. 지정 이후에는 체계적인 보전과 관리가 가능해졌고, 다양한 연구와 모니터 링 사업도 추진될 수 있게 됐다.
필자에게도 이 순간은 매우 뜻깊었다. 42년 동안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며 쌓아온 학문적 경험이 고향의 자연유산을 보호하는 데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람 중 하나는 연구 성과가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굴봉산 돌리네 습지의 국가 습지보호지역 지정은 바로 그러한 경험이었다.
6. 국가 지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많은 사람은 국가 습지보호지역 지정이 최종 목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고 해서 자연이 자동으로 보전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인 연구와 관리, 교육과 홍보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또한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생태적 가치와 관리 체계를 갖춰야 세계적인 자연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국가습지 지정 이후에도 다양한 연구와 보전 활동이 이어졌고, 결국 그 노력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결실로 이어졌다. 2024년 람사르습지 등록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성과였다. 돌이켜보면 굴봉산 돌리네 습지의 국가 지정 과정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었다.
자연의 가치를 발견하고, 과학으로 증명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공유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보전하는 과정이었다. 필자는 지금도 이 습지를 찾을 때마다 생각한다. 수만 년 동안 자연이 만들어 온 이 소중한 유산이 앞으로도 수만 년 동안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지혜롭게 지켜야 한다고.
다음 회에서는 국가 습지 지정 이후 이뤄진 연구 성과와 2024년 람사르습지 등록 과정, 그리고 국제사회가 문경 돌리네습지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고문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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