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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점촌별곡 9절 1918년, 신작로 개통과 대구-충주 간 첫 노선버스 운행

엄원식 문경시 전, 학예연구관

기사입력 2026-08-0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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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간 조선의 주요 교통로였던 영남대로에 근대적 변화가 본격화된 것은 1918년의 일이었다. 도보와 말에 의존하던 기존의 굽이진 길을 넓히고 다져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평탄한 신작로(新作路)’가 문경 지역을 관통하게 됐다.

 

신작로 개통과 함께 당시 문경에는 대구와 충주를 잇는 첫 노선버스(합승자동차)가 등장했다.
 


소달구지와 인력거, 보부상의 발걸음이 육상 운송의 전부이던 지역 사회에 기계 동력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자동차가 나타난 것은 전통적 교통 체계가 근대적 육상 교통으로 전환됐음을 알리는 분명한 지표였다.

 

이 장거리 버스 노선이 신설된 목적은 일제의 식민 행정 통제와 수탈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대구는 경상북도의 행정과 상업을 총괄하는 영남의 중심지였고, 충주는 충청북도의 구() 관찰도 소재지이자 남한강 수운을 이용한 물류의 핵심 거점이었다.

 

일제는 행정력을 강화하고 세곡과 엽연초 등의 조세를 신속히 반출하기 위해 이 두 거점을 육로 최단 거리로 연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 영남대로의 핵심 구간이 신작로로 개편됐고, 그 길목에 위치한 문경의 유곡과 점촌은 거대한 식민 물류망의 필수 경유지로 편입됐다.
 


하지만 당시의 버스는 일반 서민이 일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1910년대 초반 마산에서 진주(180, 5시간 소요)를 오가는 버스 요금은 380전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4원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 대구에서 문경을 거쳐 충주로 이어지는 장거리 노선의 운임은 쌀 수 가마니에 달하는 고액이었을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일반 서민의 한 달 품삯과 맞먹는 요금 탓에 초기의 버스는 일본인 관료와 헌병, 부유한 거상들만 이용하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대다수 지역민에게 버스는 비용을 내고 타는 운송 수단이라기보다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낯선 기계에 불과했다.
 


버스가 처음 운행된 1918년 당시 점촌의 시가지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훗날 인구 수만 명이 밀집하는 광산과 시멘트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지만, 당시의 점촌은 영강 변에 자리한 수십에서 백여 가구 규모의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다.

 

주민들의 주된 생업은 농업이었고, 마을 이름인 점촌(店村)’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 질 좋은 흙을 이용해 옹기와 질그릇을 굽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도요업(陶窯業)이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한계 때문에 대구-충주 간 버스가 문경에 처음 들어왔을 때 승객과 화물을 취급하는 주요 정차장은 점촌이 아닌 유곡(幽谷)’에 마련됐다. 조선시대 최대 찰방역으로서 수백 년간 다져진 상업적·행정적 기반이 여전히 유곡에 굳건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작로 개통과 버스 운행은 문경 지역 물류의 중심축을 점진적으로 이동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량의 화물과 사람을 싣고 달리는 자동차가 교통의 중심이 되면서 물류의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자동차의 운행과 정차를 위해서는 넓은 부지가 필요했기에 좁은 골짜기에 자리한 역촌 유곡보다 평지가 넓고 곧게 뻗은 도로를 확보하기 쉬운 점촌 들녘이 새로운 물류 거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교통망의 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상권 역시 자연스럽게 터가 넓은 점촌으로 옮겨갔다. 수백 년간 유곡을 지켜온 유곡장의 보부상과 상인들이 교통이 편리하고 확장이 용이한 점촌으로 유입됐고, 이는 오늘날 문경 상권의 중심인 점촌장(3·8일장)으로 이어지는 확고한 기반이 됐다.

 

1918년의 신작로 개통과 노선버스 운행은 영남대로의 전통적인 역참 체제를 밀어내고 농업과 옹기를 굽던 작은 마을 점촌이 근대 도시로 성장하는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 점촌에 닦인 육로와 상업적 기반이 있었기에 불과 6년 뒤인 1924년 경북선 철도 개통과 함께 점촌은 지역의 새로운 산업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기고문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이성일 기자

이성일 기자 (sllee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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