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유곡장이 점촌장으로 자리를 옮긴 까닭
1924년 12월, 김천에서 시작된 산업철도 경북선이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리에 닿으면서 지역의 상업 지형도는 근본적인 재편을 맞이하게 된다. 본래 10여 호에 불과했던 한적한 농촌 마을 점촌은 철도 개통과 함께 물산의 집산지로 급부상했다.
당시 점촌의 팽창 속도는 언론의 뚜렷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25년 7월 22일 자『조선일보』의「점촌에 신시장(店村에 新市場)」기사에 따르면, 당시 점촌은 "신축 가옥이 약 150호, 본래 있는 가호 백여 호를 합해 250호에 달하며, 직업은 음식점 영업이 40여 호, 상업가가 30여 호, 운송부(운송업) 40여 곳"이 들어설 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예천, 문경, 영주 방면의 제반 물화가 모두 점촌역을 경유하게 되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철도역 유치에 성공하자, 문경군수 박정순의 후원 아래 결성된 ‘점촌번영회’는 곧바로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바로 철도역 주변에 ‘시장(5일장)’을 신설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5일장은 점차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 조선 농촌에서는 현금 수요의 증가와 농업 외 이윤 창출 기회의 부재로 인해 오히려 시장의 수와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촌의 시장 신설은 즉각적인 지역 갈등을 촉발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1914년 제정된『시장규칙』을 통해 시장의 신설과 폐지, 변경에 대한 허가권을 쥐고 지역 유통망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제 속에서 특정 지역에 새로운 시장이 들어선다는 것은, 곧 인접 지역 장시의 몰락을 의미하는 치열한 제로섬 게임이었다.
가장 먼저 반발한 곳은 함창면이었다. 1924년 9월 11일 자『조선일보』기사에 따르면, 함창 시민들은 대대적인 시민대회를 열고 점촌 종점화와 시장 신설에 강력히 반대했다.
점촌 장이 4일과 9일로 내정될 경우, 1·6일장인 함창과 5·10일장인 산양, 2·7일장인 상주 등 인근 상권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후 예천군 용궁면까지 반대 운동에 가세하면서, 점촌 시장 신설은 기차역이 문을 열고도 7개월이 넘도록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점촌번영회는 꽉 막힌 시장 신설 대신 현실적인 우회로를 선택한다. 호서남면 관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옛 영남대로의 중심지 ‘유곡 시장’을 점촌으로 ‘이전’하는 방안이었다.
이 과정에서 점촌번영회는 상권 이전에 앞서 행정 기관을 먼저 이동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1925년 11월 9일 자『조선총독부 관보(제3967호)』와 11월 11일 자『매일신보』기록에 따르면, 유곡리에 있던 ‘호서남면 면사무소’가 시장 이전보다 앞선 1925년 10월 29일에 점촌으로 신축 이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26년 1월 13일 자『조선신문』보도에 나타나듯,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관 주재소’ 역시 유곡리에서 점촌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수백 년간 영남대로의 핵심 역도(驛道)로 군림했던 유곡리의 찰방역 인프라가, 철도라는 근대 교통수단을 거머쥔 점촌으로 완벽하게 흡수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다. 행정과 치안의 중심마저 잃어버린 유곡리가 상권(시장)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년여의 극심한 지역 간 진통 끝에, 1925년 12월 28일 마침내 유곡 시장을 점촌리로 이전하라는 당국의 공식 허가가 내려졌다. 이듬해인 1926년 1월 8일, 점촌역 앞에서는 문경군수 박정순을 비롯해 관민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시장 개장 축하연이 열렸다.
1926년 1월 14일 자『조선일보』는 이날 점촌 장에 모인 인파가 “근 1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며, 그날의 열기를 전하고 있다.
점촌 장의 탄생은 어느 날 갑자기 빈공터에 세워진 장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철도라는 새로운 동력을 무기로 주변 지역과의 치열한 갈등을 돌파하고, 찰방역 시대의 중심지였던 유곡의 관공서와 시장을 계획적으로 흡수하여 탄생시킨 근대 도시 점촌의 역동적인 성장사(成長史)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