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7.영남대로의 중심: 옛 유곡 찰방역의 영화와 위상
조선시대, 한양에서 부산 동래를 잇는 9백 리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지금의 경부고속도로와 맞먹는 국가 제일의 대동맥이었다.
조선 왕조는 이 거대한 혈관을 통제하기 위해 전국에 41개 역도(驛道)와 524개 속역(屬驛)을 거느리는 강력한 역참(驛站) 제도를 운영했다. 중종 시절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주요 거점에 종6품의 외관직인 ‘찰방(察訪)’ 40여 명을 파견, 이 역참망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 40여 개의 거점 중에서도 영남대로의 심장부이자, 한양으로 향하는 가장 험준한 관문인 새재(조령)를 넘기 직전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최대의 교통·물류 허브가 바로 우리 문경의 ‘유곡역(幽谷驛)’이다.
1472년(성종 3) 찰방 역으로 승격된 유곡역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유곡역은 단순히 말을 갈아타는 정거장이 아니다. 문경의 요성 역을 비롯해 함창, 예천, 상주, 선산, 비안, 용궁, 군위 등 무려 8개 군현에 흩어져 있던 18개의 속역(屬驛)을 관할하는 거대한 본역(本驛)이었다.
종 6품의 유곡역 찰방은 품계로는 현감과 같았지만, 각 지방의 동정을 살펴 임금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기에 보이지 않는 위세가 대단했다.
문경은 이처럼 길의 중요성 때문에 일반적인 현감과 향교 훈도 외에도 유곡역 찰방과 조령산성 별장(別將) 등 국가에서 직접 파견한 관리가 2명이나 더 상주했던 특별한 고장이었다.
조선 후기 기록에 따르면, 유곡역에 딸린 역리(驛吏)와 역노비 등 종사원만 3천 명을 헤아렸다고 하니, 주변 상권과 거주민을 합치면 그야말로 ‘만호(萬戶)’가 모여 사는 거대한 행정 도시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아홉 개 간선 도로 중 제4로와 5로가 교차하던 유곡역은 어명과 공문서, 세곡과 진상품이 오가고 사신과 암행어사가 머무는 국정 운영의 최전선이었다.
문경이 낳은 위대한 문장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 선생은 일찍이 유곡역의 지리적 중요성을 일컬어 “사람의 목구멍[咽喉]과 같다”고 갈파했다.
목구멍이 막히면 숨을 쉴 수 없고 음식을 삼킬 수 없듯, 영남의 모든 인재와 물산, 중앙의 왕명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조선 제일의 숨통이 바로 유곡역이었다.
유곡역이 지닌 진정한 위대함은 이곳이 대한민국에서 역(驛)과 관련된 실체적 유물과 고문서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유일무이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지난 1995년,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우리나라 역사 학계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유곡에서 일어났다. 전국 최초로 옛 역터(驛址) 현장에 대한 대대적인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눈부신 성과가『유곡역 지표조사 보고서』로 발간된 것이다.
흙더미 속에 묻혀 있던 관아의 배치와 역참의 구조가 이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났다.
또한, 구한말 유곡역 찰방을 지낸 임종수 선생의 후손(임성진씨 가문)들이 보존해 온 교지와 첩지, 호구단자 등 방대한『유곡역 고문서(幽谷驛古文書)』는 1998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됐다.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역참 제도가 사라진 이후, 옛 문헌과 현장 조사가 완벽하게 일치하며 역의 실체를 입증해 낸 곳은 전국에서 문경 유곡역이 유일하다.
이러한 독보적인 역사적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 문경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옛 역참 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유곡역 문화 테마파크’ 조성을 계획 한 바 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파발이 달리고 역마가 숨을 고르던 옛 찰방 역의 역동적인 풍경을 부활시켜, 문경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립하려는 장대한 프로젝트가 됐으면 한다.
수백 년 전 영남대로를 호령했던 찰방 역의 영화는 결코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전국 유일의 학술적 쾌거와 찬란한 문화유산 위에 새롭게 복원될 유곡역. 이곳은 앞으로도 점촌 시민들의 가장 든든한 역사적 자부심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교통·물류 역사 교육장으로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